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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원 회장님 한경비즈니스 기사  
--- 재경동창회 --- 8459
글쓴날짜 : 2004-05-12
이시원 (주)부천 사장
37년째 자수섬유 외길인생
미국ㆍ일본 등 세계 각지 의류업체에 수출…세계 빅5 목표
이계주ㆍ한국경제 벤처중기팀 기자 leerun@hankyung.com

 

“브래지어나 스카프에 자수로 장식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한층 높이고 커튼에도 자수를 더해 실내 분위기를 고상하게 만들어 미를 창조하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37년째 섬유인생을 걷고 있는 (주)부천의 이시원 사장(59)은 “사양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이유로 이사장이 추구하는 목표도 명쾌하다. “Not the biggest, but the Best”, 즉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이 아니라 세계 최고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되자는 것이다.


이사장은 목표를 하나 세웠다. 현재 아시아권 3위인 부천을 앞으로 5년 내 세계 5위권의 자수제품 생산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것. 이를 위해 우선 올해 회사이름, 로고 등을 새롭게 하는 기업이미지통일합(CI)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글로벌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1960~70년대는 섬유산업이 한국산업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이사장은 67년 당시 섬유류 수출 국내 대표기업이었던 남선물산에 입사해 섬유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무실은 서울에, 공장은 대구에 있었다. 이사장은 서울에서 생산과 판매, 수출 등의 업무를 맡았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땀방울을 흘렸다. 열심히 일하는 이사장의 모습에 사장도 흡족해했다. “입사 2년차 때 회사 업무규정을 만들어 사장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어요. 이때부터 사장님의 눈에 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는 팩스도 복사기도 없어 일일이 손길이 닿아야 했다. 전화는 거의 불통이었고 어렵게 연결이 돼도 몇 마디를 하고 나면 끊기기 일쑤였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서 대구까지 버스로 4시간을 달려가곤 했다. “새벽차로 갔다가 밤늦게 서울에 올라오면 몸은 파김치가 돼 있었죠.”


이사장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 “젊은 혈기에 섬유산업을 이끌어가는 선봉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평상시에는 서울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공장에서 생활했다. 입사 7년 만인 29살에는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파격 승진에 주위에서 많이 놀랐어요. 하지만 인정을 해주더군요.”


부사장이 되자 더 이상 회사에서 할일이 없다고 생각한 이사장은 ‘최고의 섬유기업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신념으로 75년 창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퇴직금과 지인들로부터 빌린 2,000만원으로 서울 오장동에 20평 남짓 되는 사무실을 마련했다. “직원 3명과 남루하게 시작했어요.”


여성의류에 주로 쓰였던 경편직물(Tricot)을 구입해 의류업체에 공급하는 일로 시작했다. 섬유회사에 있으면서 알게 된 인연으로 국내 여성의류업체를 거래처로 확보하는 등 어려움은 덜했다. 그 덕에 매출도 꾸준히 늘었다. 이사장은 78년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에 공장을 세웠다. 부지 2,000평에 450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독일제 중고 경편기계 6대를 설치했다. “낡은 기계를 조이고 닦는 데 두 달 정도 걸렸어요. 직원들과 휴일도 없이 밤을 새워가며 기계를 어루만졌죠.”


초기에는 망사류 여성속옷을 만들었다. 자체개발한 것으로 그동안 일본과 영국에서 전량 수입해 오던 제품을 대체하게 됐다. 이사장은 기술개발을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82년부터 망사에 자수를 넣은 제품을 내놓았다. 독일제 자수기계 6대를 놓고 시작했다. 자수가 들어간 망사속옷은 80년대 들어 중동지역에서 대히트를 쳤다. 폭주하는 주문에 24시간 풀가동해도 주문물량을 못 맞출 정도였다. 직원도 90여명으로 늘어나고 기계도 30대로 확충했다. 연간 40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중동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다른 업무를 못할 지경이었다니까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88년에는 신축성과 촉감이 뛰어난 ‘스판덱스골지’를 개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제품이 생산되면서 매출은 100억원대에 올라섰다. 생산제품 전량을 중국으로 내보냈다. 국내에서는 스판덱스골지의 인기가 신통치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선풍적이었다. “중국에 출장을 가면 상하이와 베이징 거리의 여성들 대부분이 스판덱스골지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죠. 농촌에서까지 유행했을 정도로 광풍이었어요.”


스판덱스벨벳을 개발한 93년부터 미국ㆍ일본 등 수출국가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그해 5월 인천 남동공단 내 3,500평의 부지에 연건평 2,000평의 공장을 짓고 스위스 사우라사에서 자수기계 15대를 들여놓았다. 사우라사에서 자수기계를 도입할 때의 뒷얘기 한토막. 이사장이 자수기계를 구매하겠다며 사우라사를 찾아가자 이 회사 기계담당자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 팔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이사장은 4전5기의 길을 걸어 간신히 기계를 살 수 있었다. 이후 쌓인 신뢰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1년 동안 스위스 기술자들이 한국에 상주하며 기술이전을 해주고 돌아갔어요.” 이사장은 직원들을 매년 스위스 아본시에 있는 자수학교에 보내 연수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자수제품은 품질을 인정받아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와코루가 구매해갈 정도다. 이사장은 “일본의 주이쓰 리나에 이어 아시아권에서는 세번째 기술력을 갖고 있다”며 “5년 내 세계 5위의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국내 고급 속옷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연간 2,000여점을 개발해 600점 이상을 상품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자수디자인만 1만5,000점이 넘는다. 섬유원단 품목수는 50여개.


부천은 외환위기에도 끄떡없었다. 97년 말 충남 천안에 100억원을 투입해 섬유원단 공장을 새로 지었지만 수출경기가 좋아지면서 더 넓은 공장을 마련해야만 했다. 2000년에 다시 150억원을 들여 충남 아산시내 1만평의 부지에 5,000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했다. 독일에서 신형 기계 30대를 들여오고 전 공정을 자동화했다.


부천은 기술력을 통해 미국과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선진국의 대표적인 의류업체에 매출액의 70%를 수출하고 있다. 올해 매출목표는 300억원.


이사장은 요즘 한가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섬유 관련 디자인 원본과 샘플을 전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전통자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수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것.


패션과 함께 외길인생을 걸어온 이사장은 바쁜 시간 짬을 내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 패션섬유예술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난 95년 8월에는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02-2189-7501)

출처 : 한경비즈니스 2004년 2월9일 4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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