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CEO]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싸구려는 누구나 만든다"…품질 또 품질
전기료 못내던 때도 무자료·뒷돈 요구하면 단호히 거래 끊어
"컨트리리스크 먼저 파악" 중국시장 이해하기 위해 규제심한 베이징 선택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창업을 위해 대웅제약 부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인생 정점의 순간임에도 꿈을 위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무모한 혈기`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윤 회장의 창업은 혈기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치밀한 준비 끝에 내지른 회심의 한 방이었다. 높은 연봉이 보장되던 첫 직장 농협중앙회를 4년 만에 그만두고 당시 중소기업이던 대웅제약으로 옮기면서부터 윤 회장은 마음속으로 창업을 꿈꿨다. 생산, 영업, 관리 등 회사 주요 파트를 두루 거치면서 다방면의 경험을 쌓은 것도 창업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16년간 대웅제약 생활을 마무리한 윤 회장은 1990년 충남 연기군에 작은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3명과 함께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최대(매출액 기준) 화장품 ODM(제조자개발생산) 기업 한국콜마는 이렇게 닻을 올렸다.
윤 회장은 중소기업 특성상 자체 브랜드를 만들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의 사업모델을 선택했다. OEM 전문기업으로 동양권에서 이름이 높던 일본콜마를 찾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반일감정의 골이 깊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았던 탓에 일본콜마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수차례 일본을 찾아가 본인의 열정을 어필했고 결국 합작을 성사시켰다.
"콜마라는 브랜드를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국 화장품시장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탓에 매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2년 가까이 제대로 된 고객은 구경도 못 한 채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소일거리만으로 연명했죠. 전기료를 제때 못 내 단전 통보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전기료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중 꽤 큰 주문이 들어왔다. 하지만 고객사는 `무자료 거래`를 요구했다.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흔히 있던 일이었다. 다른 고객사는 주문을 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 회장은 모두 거절했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절실한 주문이었지만 원칙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직원들도 직접 설득했더니 믿고 따라줬습니다."
직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윤 회장은 한 중견기업 회장을 찾아가 계약금을 요구했다. 갑을관계가 명확하던 당시 화장품업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납품에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보증서까지 써서 가져온 윤 회장을 보고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계약금을 지급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콜마의 자금난은 숨통이 틔었고 사업은 점차 성장가도를 달렸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른 이후 윤 회장은 "고객사 주문을 받아 제조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ODM사업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그의 관심은 오로지 품질에만 쏠렸다. 자체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했고 품질관리 인력도 대폭 보강했다. 국내 최초 화장품 ODM업체로서 품질관리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94년에는 보건복지부의 화장품업계 품질인증인 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CGMP)도 취득했다. 품질 최우선주의 때문인지 한국콜마 제품은 경쟁사에 비해 단가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윤 회장은 가격이 비싸다는 인식에 대해 그다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값싼 원재료를 사용하면 가격이야 얼마든지 낮출 수 있다"며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국 경쟁력을 잃고 만다"고 주장했다.
품질경영 덕에 한국콜마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속에서도 연평균 20%의 매출 성장을 꾸준히 달성했다. 지금은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국내외 약 250개의 고객사와 연 1회 이상 거래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비상장 계열사까지 합쳐 5500억원을 기록했다. 전 세계 9개국에 거점을 확보한 글로벌 콜마 네트워크의 연구인력 교환과 트렌드 관련 세미나 등 교류활동에도 활발히 참가하고 있다.
한국콜마는 2007년 중국시장에 도전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상하이로 진출하던 것과는 달리 한국콜마는 베이징에서 둥지를 틀었다. 사업을 하기 전에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게 윤 회장의 판단이었다.
오랜 시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바로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관련 건설공사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중국 정부의 지시로 인해 한창 진행 중이던 한국콜마 공장 건설공사는 10개월 동안이나 정지됐다. 관련 행정절차까지 합치면 1년 이상 준공이 늦어진 셈이다. 하지만 윤 회장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가장 규제가 엄격한 베이징을 선택한 겁니다. 공장 준공 전 시행착오는 중국에서 한국콜마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한 훈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한국콜마는 지난해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며 정상궤도에 올랐다. 올해는 200억원, 내년에는 400억원을 매출 목표로 잡고 있다. 윤 회장은 "중국시장에서도 한국콜마의 품질이 소문나면서 신제품 발표회에 전국 각지의 고객사가 몰려온다"고 귀띔했다. 한국콜마는 베이징 공장을 현재의 5배 규모로 증설할 계획이며 광저우 공장을 짓기 위한 절차도 진행 중이다.
윤 회장은 회사와 직원의 관계를 땅과 풀에 비유한다. "대지는 이름 없는 풀을 키우는 법이 없다(地不長無名之草)"는 말처럼 한국콜마에서 일하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직원 개개인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경영자는 인내하고 책임지는 역할만 하면 된다"며 지금의 한국콜마를 있게 해준 `유기농 경영`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 윤동한 회장은…
△1947년 대구 출생 △1970년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1974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1970년 농협중앙회 △1974년 대웅제약 △1990~2003년 한국콜마 사장 △2004년~현재 한국콜마 회장